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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은 짓는 대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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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산법광 작성일2008.02.16 조회3,2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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卍-업은 짓는 대로 받는다.-卍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은 우리 주변의 모든 현상이 우리들의 업으로 인하여 이루어지고 그 업은 짓는 대로 받는데 무자년 새 아침을 맞이하여 우리나라 농촌문제에 그 중점을 두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매우 가난한 나라 조선의 말기에 태어나서 일본사람의 착취 속에 일본의 종으로 사는 36년간의 3/1을 살았습니다. 배고프고 한가로운 가난한 시대에 살아온 여러분의 할아버지 할머님이 일본의 종으로 길들여지는 교육을 받으면서도 독립의 꿈을 안고 가난 속에서도 먼 장래의 희망을 안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요즈음 잘사는 시대에 없는 것 없이 다 가지고 풍요를 즐기며 잘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이래로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고 또 가족의 필요에 의하여 한집에 자가용 2-3대 있는 집도 있습니다.

        세탁기, 냉장고, 전화, 휴대폰 양변기에 비데까지 설치하고 텔레비전, CCTV, 이렇게 많은 것을 갖춰놓고 산적이 없었습니다. 직장이고 가정에서 날마다 잘살아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별로 밝아지지 않고 있는듯합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서 수출도 많이 하고 외화도 많이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월급도 많이 받고 승진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회는 날로 환경오염에 시달리고 온갖 범죄와 사고로 어수선 해서 전쟁이다 테러다 물가고다 교통문제와 교통사고로 사람들의 표정은 무겁기만 합니다.

        예전에는 움막이나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집에서 짐승도 키우지 않습니다.
        옷들도 좋아졌습니다.
        음식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요즈음은 김장들을 많이 하지 않고 사먹으며 부침개를 부쳐 먹는 집보다 피자를 시켜먹는 집이 많아졌고 식혜나 수정과보다는 커피가 입에 밴 사람들이 많아 졌습니다.

        사먹는 음식이 더 많아 졌으며 김치에 시래기 국에 된장 부글부글 끓여먹던 시대가 가고 돈으로 편하게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급격한 생활 변화가 경제성장과 함께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서 추구해야할 바도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먼 미래를 향해 목표를 세우고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본능적으로 눈앞의 이익이나 욕구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입학, 승진, 높은 수익,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차, 명예, 인기 등등 성취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합니다. 열심히 산다는 것도 좋고 노력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 노력하는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볼 때입니다.

        좋은 것을 갖고자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것이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닌지에 대하여 생각해볼 때가 됐습니다.
        더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것 보다는 남들과 함께 잘살기 위한 일을 추구한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지요.

        인간의 욕심을 물질로는 다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하고 좋은 생각을 하는 것 남을 위해서 내가 아끼는 것을 주는 것 이런 것들은 채우고자 하는 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남과 더불어 사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한말이나 행동이 남에게 미치는 영향은 큰 것입니다.
        아이들이 놀다가 남의 집 담장 안으로 돌을 던졌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재미로 그런 놀이를 한 것이니까 사실 아무 일 아닌 것 같지만 그 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담장 곁을 지나다가 별안간 날아든 돌에 맞아서 죽는다면 살생을 한 것입니다. 또 농촌에서 병충해를 막고자 농약을 남용한 결과 요즘 농촌에서는 개구리나 메뚜기 같은 곤충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결국농촌도 푸근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지 못한 채 생산성 향상을 위한다고 하면서 눈앞의 실리 추구만을 따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땅은 점점 더 나빠지고 농촌은 환경오염에 시달리게 된 것입니다. 만약 당장의 실리는 적더라도 땅을 보호하면서 농사를 지어야 오염도 적고 좋은 땅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가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을 생각하고 남과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사실 실생활에서 모든 사람들이 나와 무관한 사람일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와 모두 다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며칠 전 어떤 처사가 절에 왔다가 내려가는데 대변이 마려워 계곡물에 시원스레 실례를 했다고 합니다.
        하산하다보니 자기 아들, 딸들이 친구들과 밥을 지어먹고 있더랍니다. 자기 딸이 계곡물을 떠서 밥을 짓는 것을 보고 그 처사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렇게 우리는 엉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을 가슴 아프게 한 과보는 꼭 받습니다.
        옛날 아사세 왕의 부모는 돈독한 심신을 가지고 있는 불자였습니다.
        그들은 이웃나라를 침략하기보다는 사이좋게 살기를 바라는 평화주의자들이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어 고통을 면해주고 불교 교단을 지탱해가던 장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사세왕은 명예욕과 소유욕이 남달리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걸 꿰뚫어본 제바달타가 접근하였습니다.
        제바달타는 부처님의 사촌형제이며 부처님을 시기하여 수차례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제바달타는 아사세를 꼬여 아버지를 살해 하도록 했습니다. 아사세가 전생에 히말라야에서 수행하고 있던 자신을 아들을 얻으려는 욕심으로 죽였다고 하면서 총을 겨눴습니다. 감옥에 가두고 굶겨 죽였습니다.

        자기가 저지른 과보는 이렇게 꼭 받습니다.
        또 이일이 있은 후 아사세왕은 종양에 걸려 고생하고 난후 자신의 죄를 부처님 전에 참회하고 병고에서 벗어났고 다시 인자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나라에도 있지요.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임금이 된 세조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단종을 죽여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에 못 이겨 영월로 귀양 간 단종을 죽이고 맙니다.

        그 후 세조는 심한 종양에 시달려 고생을 하였습니다.
        백약이 무효하였지만 원래 불심이 있던 사람이라 오대산으로 휴양을 갔다가 문수동자를 친견하고 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남에게 억울한 죄를 짓게 되면 이와 같이 꼭 받게 됩니다.

        우리불교인들은 이웃에게 좋은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불교를 믿건 안 믿건 자비심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사실 요즘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 농촌! 이대로 좋은가?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치가 농촌을 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자동차, 전자제품을 팔기위해 해외 농산물을 사 주어야 한다면 자동차, 전자제품 판 이익금의 일부는 농촌에 쓰여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의 고장 농촌은 우리 힘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아이들 울음소리가 없는 농촌!
        노인네들이 겨우 땅을 지키고 있는 농촌!
        한 마을에 어린애가 1년 내내 하나도 태어나지 않는 농촌!
        농사를 지어봤자 생산비도 않나오는 손해 보는 농촌!
        이렇게 피폐해져 가도록 나둔 정부 정책의 인과응보는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걱정입니다.

        이 산승은 농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현실에 앞으로 언젠가는 그 과보가 돌아올 것인데 그때를 위하여 미리 우리 불자들은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농촌 부흥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자동차 전자제품 수출해서 이득의 1/2은 농민에게 돌아가게 돌아가야 합니다.
        농촌에 초등학교가 없어져 버리고 힘없는 노인들이 지켜가는 농촌의 현실을 우리가 도울 일은 없을까? 깊이 생각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언젠가는 농촌을 어렵게 했던 그 인과응보는 있습니다. 그때를 헤쳐 나갈 정책도 미리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우리 7천만 국민 앞에 커다란 시련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니 앞날에 대처할 것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을 산승은 간절히 기원하는 바입니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남을 헤친 과보는 무거운 것입니다.
        남을 위해 내가 열심히 산다면 그 과보는 나를 행복으로 이끌게 되어있으며 이 사회를 평화롭게 만들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조상님들께서 늘 가꾸고 아끼던 논밭이 다 농촌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부모님이나 친척이 거의 농촌에 농사일을 하시고 농토를 지키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계시고 지금은 도시로 이사한 사람들도 잇지만 농촌에 사셨던 조상님을 공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내가 늘 잊지 않고 남아있는 그곳이 고향이며 농촌입니다.

        성공을 원하는 사람들은 어떤 일에 부딪쳐도 절망하지 않고 패배함이 없이 고향, 부모형제를 생각하며 평화로운 마음을 간직하고 건강을 유지해 가면서 지칠 줄 모르는 힘이 고향, 부모형제를 사랑하는데서 생겨난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설이나 추석명절 때는 고향집을 찾아와 교육의 장으로 널리 이용해 왔는데 그 내용이 사람답게 사는 4가지 덕목이 있습니다.

        첫째,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한다. 잘못해놓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사람이 아니고 짐승과 같다.
        둘째는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내 이웃에 힘겨워하는 중생이 있을 때 불쌍히 여겨 도와주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고 짐승과 같다.

        세 번째는 은혜를 갚아야 한다. 은혜를 모르면 그 또한 사람이 아니다.
        네 번째는 어떤 문제에 접하여 옳고 그름을 구분해야 사람이다.
        위의 네 가지를 지키지 않으면 얼굴은 사람이되 속은 개, 돼지, 짐승과 같다고 집단적인 가족단위의 교육장으로 여겨서 설, 추석명절에 고향을 찾지 않는 사람을 야단쳤던 것이며 스스로 쓸쓸히 보내며 고향을 찾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의 설 행사에도 이렇게 좋은 점을 본받아 교육해야 될 것이다.

        옛날 일본국 자각대사가 당나라에 구법순례를 가다가 개성에서 4년간 살면서 보니 설, 추석명절만 되면 민족 대이동이 벌어짐을 보고는 하아! 이상하다! 누가 사기 쳐서 많은 국민들이 움직이면 돈을 준다고 하여도 저렇게 고향집을 꼭 같이 찾아들겠는가! 이런 풍습이 민간사회에서의 풍습일 뿐만 아니라 사찰에서도 멀리 갔던 제자스님들이 행자시절을 같이 지냈던 큰스님이 계신 절에 모여 은혜도 갚고 친목도 다지고 사람으로서 지켜야하는 4덕목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자각대사의 <입당구법 순례기>에 적혀있습니다.

        불교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우리 민족과 전통을 존중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자각대사의 기록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선사시대부터 내려오는 인류의 공통문화가 바로 달에 관계된 풍속이 성대히 거행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전기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였던 만큼 달 밝은 보름날은 자연 축제를 벌이곤 했습니다.
        온갖 햇 음식을 차려놓고 조상과 자연에 대한 감사의 행사를 보는 외국인들의 마음속으로는 부러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새것과 새 곡식을 조상님께 먼저 올렸던 그 마음이 바로 우리 겨레가 문화민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마음의 뿌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금 농촌의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당연한 것입니다.

        요즘 고유명절도 행사처럼 치루거나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경향이 잇지만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한민족의 끈끈한 정을 느끼며 살아 올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조상님들이 조상을 존경하고 후손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임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전자제품팔기에 급급하여 농촌을 내팽개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후손을 생각하는 배려여서 꼭 농촌은 부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농촌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춤과 놀이를 즐겼으며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농사가 잘된 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그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인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농촌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고향에 남아있는 땅을 투기에 이용할 생각을 하고 이웃사람들과 정담을 나누기 보다는 도시에서의 삶을 과장해서 얘기하거나 잘난 척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실정입니다.

        이런 대화만 나눈다면 고향의 정서를 변질시키는 잘못된 사람이 아닌가하고 산승은 생각합니다.
        농촌은 우리 모두의 고향입니다. 고향은 마음을 나누는 곳입니다. 마음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즉 어떤 마음을 나누는가가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좋은 마음을 많이 나누는 농촌은 어떤 곳보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곳이고 경치가 좋고 이름난 고장이라 해도 인심이 흉흉하면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훌륭한 농촌! 우리의 고향은 우리의 마음으로 만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한 고향! 농촌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 그리고 넉넉한 인심이 오고가는 마을, 아름다운 경치를 보존해 나가며 농사일로 생산성에 기여하는 사람들 바로 우리가 찾아가고 싶어 하는 고향이며 농촌입니다.

        지금 자신이 고향으로 여기는 농촌마을에 부처님의 불성을 심고 가꾸는 사람들에겐 늘 훈훈한 보름달이 비춰 넉넉하고 밝은 마음, 늘 아름다운 고향 농촌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고향 농촌마을 들판에는 황금물결을 이루는 가을이 있고 여러 가지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불교의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악업을 멀리하고 선업을 짓는 일입니다. 선업을 짓는 방법이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이 기본입니다.

        은혜를 갚는 사람은 마땅히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즉, 진심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대지도론에서는 은혜를 안다는 것은 대자대비의 근본이며 선업을 여는 첫 문이다. 이런 사람은 남의 사랑과 종경을 받아 멀리까지 명예가 들리며 죽은 뒤에야 천상에 태어나 불도를 성취하기에 이른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축생보다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해야할 대상은 누구일까? 부모, 형제, 이웃, 신세를 진사람, 스승, 친구, 여기까지는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고마워해야할 대상이라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대상이 하나 빠져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농촌, 자연입니다,
        들, 산, 나무, 풀, 물 등 무정물, 소, 개, 돼지, 닭, 염소, 오리 등 온갖 짐승을 아우르는 자연입니다.
        우리가 농촌을 아끼고 자연에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 것은 자연이 바로 우리 삶의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집을 짓고 사는 곳은 땅입니다.
        집을 짓는데 필요한 재료인 흙, 모래, 돌, 나무 등은 모두 농촌! 자연에서 얻은 것입니다.
        물이 없거나 공기가 없다면 우리는 하루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숲이 없다면 짐승이 살 수 없고 추위, 더위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맑은 공기, 약초, 땔감, 건축재료 등등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것들을 줍니다.
        산에 가면 마음이 밝아지고 탁 트인 바다를 보면 답답했던 마음이 확 뚫리지 않으십니까?

        그런가 하면 농촌의 들판은 우리에게 양식을 줍니다.
        우리 삶의 토대인 농촌 즉 자연이 없다면 우리는 잠시도 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농촌과 자연은 우리 인류의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무의식 적으로 농촌과 자연을 감사의 대상에서 빠뜨리는 것입니까?

        은혜를 알고 감사해야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서양의 석학들은 서구 기독교 인간관, 세계관, 자연관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일신을 주장하는 타종교는 신에 대해서는 인간이 중심이 되지 못합니다.
        철저하게 신의 뜻에 따라야 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당연히 인간은 신이 될 수 없고 신 이외의 인간이 철저하게 지배합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고 자연을 이용해야 된다는 생각을 해왔다가 이번에 지진이다. 허리케인이다. 크고 작은 태풍으로 많은 물질적 손해와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초월적 신을 상정하지 않습니다.
        맹목적으로 복종해야할 대상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인간이 주체가 됩니다.
        불교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독단적으로 주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 삼라만상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서 <벽암록>이나 <전등록> 같은 책에 천지와 나는 한 뿌리요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

        그러니 인간만이 중요한 기독교 사상 같은 것이 아니라 전체 자연이 모두 존귀한 존재이므로 이론으로 농촌과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전생에 인간으로만 태어났던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사슴으로 원숭이로, 토끼로 태어나는 등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중생에 어려움이 있을 때 자비심으로 동족을 위기에서 구하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그들의 목숨을 구했고 급기야는 인간들의 무지함을 깨우쳐 주었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인간만이 이 세상에 존귀하다면 부처님이 동물로 등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동물뿐만 아니라 물, 산, 바위 등 무정물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표하셨습니다.
        <중부경전>에 부처님이 심한 고행을 닦는 동안에도 한 방울의 물에도 애정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카카에서 일주일동안이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은 후 앉았던 자리와 그늘을 제공했던 나무 앞에서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상응부>경전에 “공원이나 숲에 나무를 가꾸고 싶은 사람은 공덕을 쌓아 천당에 이른다고 했고 부처님과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쫓아 숲을 보호하고 찬미했습니다.

        “울퉁불퉁한 바위들 그곳은 맑은 물이 좋아하는 바위의 세계. 검은 얼굴의 원숭이와 겁 많은 사슴들이 드나들고, 바위돌이 서있는 물이끼에 덮인 곳. 내 마음의 기쁨의 고지 나는 산과 숲의 동굴에 머물렀노라 그곳은 야외 동물이 배회하느니라.”

        불교인들은 자원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참선하는 선사들은 산천초목 같은 무정물이 설법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중국의 소동파는 “흐르는 계곡물은 부처님의 장광설법이요,
        푸르른 산색은 청정 비로자나 법신이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풍수지리설의 원조로 알려진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 또한 자연과의 원만한 조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요즈음 풍수지리하면 명당 잡아서 복 받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중국의 풍수지리지 우리 고유의 것은 아닙니다. 도선 국사의 풍수설은 지맥이 약하거나 불길한 산세, 즉 지리적인 단점, 병든 자연을 절을 짓거나 탑을 세워서 결점을 보완하려한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불교사상에 입각하여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고 보존했는데 지금은 황폐한 쓰레기 강산으로 변하고 있는 데가 많습니다.

        온 산하가 무분별한 개발과 쓰레기 등으로 급속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습니다.
        불교사상이 아무리 훌륭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연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잘 보호하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그 가르침을 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늘 탐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잇는데도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다보니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생깁니다. 강이 썩고 공기가 탁해 집니다.

        이제는 고향 농촌으로 생각을 돌려볼 때가 되었습니다.
        농사를 지어도 손해 보는 농사, 농촌에 늙은이만 마을을 지키는 실정, 1년 내내 한 마을에 아이 한명 태어나지 않는 농촌, 자동차나 전자제품 팔기위해 농촌을 푸대접해버린 지금의 실정을 이대로 둘 것인가?

        우리의 농촌! 휴가 길에 고향으로 가는 길에 산과 들판을 한번 잘 보십시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그 세계가 바로 우리를 보듬고 있는 세계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를 살려주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농촌 마을입니다. 농촌을 살려가야 할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를 챙겨보시기 바랍니다. 불질적인 고향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마음의 고향은 그보다 더한 보배임을 명심해서 농춘을 허술히 여겨 농촌에 사시는 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종종 TV에 농촌의 농민이 궐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년 내내 농사지었으나 배추 값이 너무 떨어져서 이익이 없으니까 정부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다고 그 아까운 배추밭을 수확하지 않고 갈아엎는 광경과 농촌정책에 반대하여 경운기를 길게 앞세워 행진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금년 가을 어느 농촌에서는 벼논에 기름을 뿌리고 불 지르는 광경도 KBS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농민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서는 미래에 언젠가 큰 화가 우리에게 돌아올 것을 우리 불자는 대비해야 합니다.

        과거를 알려면 지금의 형상을 보고 미래를 알려면 지금의 행위를 보라고 했습니다.
        업장은 꼭 소멸해 가며 그 보상을 치러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의 사람들 물질문명에 노예가 되어서 너무 큰 돈! 돈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돈만 벌어드리는 국가는 잘살고 국민은 행복하다는 생각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돈은 생활을 위한 방편일 뿐 행복을 위한 수단이지 생활이나 행복자체는 아니라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을 우리들은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십년 전에 전세방이나 사글세방에 살다가 가까스로 수년전에 돈을 착실히 모아 내 집을 장만한 사람들 있지요? 요즘 집값이 껑충 뛰어서 억만장자가 되신 분도 있습니다. 억만 장자가 별것입니까? 억짜리 집에 살면 억만장자지요. 억대의 집에서 사니까 집에서 웃음꽃이 피던가요? 일이 편해지고 아픈데도 없고 병원이나 약국을 찾을 일도 없어지던가요? 그렇지가 않을 것입니다. 왜요?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부족해지는 요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이 바로 돈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평생을 한 벌의 옷과 한 벌의 바리때로 만족하고 사셨습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아는 이 사실은 우리에게 돈이 행복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마음만 내키면 인도대륙을 호령하는 전료성왕도 될 수 있었고 부왕의 재산만 물려받아도 한평생 돈 걱정은 안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대도 그것을 취하지 않은 것은 돈과 권력으론 행복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만이라도 하루 속히 곤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잇다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또 사회가 이처럼 혼탁해진 원인은 결과만을 보고 과정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한탕주의에 오염이 되어 버립니다.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그와 같은 결과를 이뤘는가는 별 문제로 여기지 않고 이룩된 결과만을 봅니다.
        그래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목적하는 바를 달성해야겠다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떠한 탁한 짓이라도 가릴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18세기 무렵 유럽의 백인들이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붙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먹은 요즈음 자기 동족의 소년, 소녀, 부녀자까지 납치해서 유흥업소에 팔아먹는 한국판 노예상인들이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적은 노력으로 일시에 큰돈을 벌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 돈을 쓰는데도 문제가 있습니다. 피땀 흘려 번 돈이 아니므로 흥청망청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결과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제도하는 데에 무한한 방편, 즉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수단은 선한 방편입니다.
        선한 방편을 쓰는 것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성불하기 위해서도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한량없는 오랜 세월을 인욕 하여 마침내 성불에 이른다고 했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불만하라는 말씀은 어느 경에도 없습니다.

        선한 수단을 선방편이라고 합니다.
        일확천금이다, 농촌의 농민들이 마음 호소할 길 없어 자기네들이 힘써 기른 농작물을 갈아엎어 버리도록 나둔 정책이나 도시인들이 싼 외국산 농산물만 사는 등 안 좋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농산물을 아끼고 소중히 하면서 소비해 주어야 우리 농촌이 살아남습니다.

        사람이 저지른 업은 꼭 받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이란 각자의 마음이 다시 영혼이 사람의 몸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몸으로는 한순간에 사는 것이므로 아무리 오래 살려고 해도 백년정도 밖에 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받은 몸은 음식으로 만들어진 물질이므로 몸에 큰 병을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고 살다가 큰 병을 얻을 수도 있고 갑자기 사고로 마음이 몸을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몸은 마음에 옷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생각으로 살게 되는 마음은 그 본체가 진리법이기 에 이 우주에서 영혼이 자기 생각으로 살게 되고 합리적이고 선한행위로 살면 행운과 행복이 오게 되고 죄가 되는 행위로 살면 불운과 고통이 오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히 사는 자기 마음, 영혼이 있어야 부모에게 몸을 받을 수도 잇고 또한 몸 안에 마음이 들어 있어야 살아있는 몸인 것입니다. 몸도 마음이 있을 때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마음이 몸에서 떠나가면 시체가 되어 물건처럼 처리해 버립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이 진실한 생명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알게 되면 죽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이 다음 생을 받을 때 이때까지 마음으로 살아온 행위에 따라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중생으로 새로운 국토와 몸 모양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답게 살았으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짐승처럼 살았으면 짐승의 몸을 받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맘을 가지고 자기의 행위를 참회하며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움직이면서 무엇인가의 행위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 않은 정신적 또는 심리일지라도 거의 끊임없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온갖 가지각색의 실수가 잇따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시행착오를 거듭해가면서 한 사람의 몫으로 삶을 해 가는데 잘못과 실수를 저질렀으나 참회하면서 수습하는 태도에 따라 크게 삶의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산승이 걱정하는 농촌의 극복을 무자년을 맞이하는 신년 초에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수 있는 마음을 온 국민이 가졌으면 합니다. 이번에 서해안 기름 유출사건도 온 국민의 힘을 모아 기름을 닦아내듯, 농촌의 무관심도 정치권에서 참회하는 맘으로 크게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농촌은 우리 모두의 고향이며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하루 속히 농촌이 손해만 모는 정책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짓는 업대로 우리 스스로가 받게 됩니다.

        앞으로 농촌을 무관심 했던 무서운 업이 닥치기 전에 우리 모두 농촌의 사랑을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불기 2552 년 2 월 10 일.


        원주 백운산에서 세계불교 법륜종 종정 보산법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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